사리원은 조선인 가옥과 일본인 가옥이 3, 4천 호 되는 장래 발전에 큰 기대가 있는 지역으로 장로교 2개소, 감리교 1개소가 있었다.
사리원교회는 황해도에 처음으로 설립된 성결교회로 1926년 6월 25일 성서학원을 막 졸업한 이준수를 주임으로 변남성을 부임으로 파송하여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면 북리 38’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동양선교회는 1926년 연회의 결정에 따라 7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시장전도대’ 림용륜·김영수 대원을 사리원에 주재하게 하고 사리원교회 전도 활동을 지원하였다.
11월 28일 밤에는 ‘감사예배회’, 12월 20일 밤 7시에 ‘성탄기념예배회’, 26일 오전 10시에 ‘유년주일학교 시상식’ 등을 거행하였다.
1927년 1월 10일〜12일까지 ‘소아전도회’를 열었는데 42명의 어린이들이 새로 믿기로 결심하였다.
이어 2월 3일〜7일까지는 하루 두 번씩 특별집회를 열고 새벽에는 시장전도대 림종륜 전도사가 기도회를 인도하였고, 저녁에는 전도회로 모여 본 교회의 교역자가 인도하는 중 많은 은혜가 교회 내외에 임하였다.
4월 3일에는 청년·학생 10여 명이 마련해준 기부금으로 유년주일학교의 제1회 졸업식(졸업생 1명)과 제2회 시상식을 거행하였다.
6월 25일〜29일까지 5일간 ‘서선장막전도회’가 열렸다. 장막전도대원들이 대고(大鼓)를 치고 나팔을 불며 사리원 시중(市中)으로 행진하였고 매일 입추의 여지가 없이 천 명 이상의 청중들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9월 11일 주일에는 ‘창립 1주년 기념 예배’와 함께 1인의 집사 위임식과 헌당식, 남녀 7인의 학습 문답이 있었다.
9월 30일과 10월 1일에는 ‘양조품품평회’시기를 이용하여 장로교·감리교와 ‘연합대전도회’를 개최하였고, 시장전도대원 20여 명은 노방설교, 전도지배포, 개인전도 등을 지원하였다.
1928년 5월 1일 변남성 전도사가 담임 교역자 되었고 교회를 ‘사리원면 북리 4’로 이전하였다.
11월 18일 주일에는 ‘추수감사주일’로 모여 주의 은혜를 감사하였고 12월 23일 주일에는 리건 목사의 집례로 남녀 5인의 세례 예식과 민병순·변준식·김준일 3인의 집사 장립이 있었다.
12월 30일에는 유년주일학교와 장년주일학교의 시상식이 있었다. 사리원교회는 30여 명의 회원을 둔 성경연구회가 운영되었고, 사리원 관내를 3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 구역에 남녀 각 1인씩 구역장을 두어 매주 1회씩 구역회로 모여 은혜를 나누었다.
1930년 7월 성서학원을 졸업한 안형주 전도사가 담임교역자로 부임하고, 1933년 10월 고명남 전도부인이 부임하여 사역하였다.
하지만 안형주 목사가 1936년 ‘하나님의 교회의 분열 사건’에 참여함으로 “본 단체와 교리불합(敎理不合)이 한 이유’로 12월에 면직됨에 따라 교회 내부의 갈등이 있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1937년 1월, 평양교구정교회 정용현 목사, 1937년 7월 31일에는 박형순 목사, 뒤를 이어 강태즙 목사가 부임하게 된다.
1938년 서부지방회의 결의에 따라 ‘사리원구역 연합전도회(대 :강태집·함석진·김상운·송게순·김기삼)’는 8월 31일 밤 재령북률교회에서 시작하여 겸이포·사리원·신천·해주교회에서 각 5일간씩 집회하고 9월 26일에 마쳤다.
1941년 6월 25일(주일) 이명직 목사가 사리원교회를 순회했을 때에 6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후 사리원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이천영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를 재건하고 주일마다 6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1947년 이천영 목사가 월남한 이후 강태즙 목사가 뒤를 이어 목회하였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