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이포는 1916년에 송림면에서 겸이포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0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겸이포읍은 황주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읍으로 당시 인구는 1만여 명이었다. 겸이포읍은 제조업이 발달한 손꼽히는 주요 공업도시이었다.
1914년에 일본의 ‘미쓰비시사’에 의해 조선 최초의 근대적 제철공장인 송림제철소가 건설되었는데 이곳에는 용광로 3기와 압연공장·제강소·화학공장·코크스공장·저탄장 등이 건설되어 중공업이 발달하였다. 성결교회가 설립될 당시 황주군의 종교상황은 불교사찰 8개소, 천주교성당 5개소, 개신교교회 36개소, 안식교교회 2개소 등이 있었다.
겸이포성결교회(황해북도 황주군 겸이포읍 본정 78)는 1933년 3월 18일에 김제근 전도사를 파송하여 설립하였다. 하지만 11월 28일 김제근 전도사가 휴직하고, 이사회는 1934년 2월에 김 전도사를 해임한다. 그의 후임으로 1936년 함석진 전도사가 부임한다.
1938년 서부지방회의 결의에 따라 사리원구역 연합전도회가 8월 31일 밥부터 재령북율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대원은 강태집·함석진·김상운·송계순·김기삼 등이었다. 집회는 매일 새벽기도회, 오전 사경회, 밤 전도회로 세 번씩 집회하였다. 노방전도도 하였다.
각 교회에서 특별집회를 기다리고 갈망하였던 만큼 각 교회마다 큰 은혜가 임하였고 많은 구도자가 있었다. 집회순서는 재령북율교회, 겸이포교회, 사리원교회, 신천교회, 해주교회였으며 각 교회마다 5일간씩 집회하여 9월 26일에 마쳤다.
믿기로 결심한 신자의 수효는 겸이포교회가 70명으로 최고였다. 호열자 유행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집회진행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겸이포교회는 창립된 지 6~7년이 되었음에도 교세가 부진하여 1939년 11월 8일까지 예배를 드리고 폐교한다는 의미로 교역자가 떠났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에서 신자 3인은 ‘낙루호곡(落淚號哭, 눈물을 흘리고 곡을 하며 호소함)’을 하면서 교역자를 보내주시지 않아도 좋고, 지금 당장 예배당은 따로 없지만, 간판만은 우리 집에 보존하게 해 달라고, 이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함으로 허락을 받음과 함께 계속 모여서 기도회를 하며 겸이포성결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 가운데 노권충 씨 100원, 홍관의 씨 100원, 이학수 씨가 100원을 헌금하였고, 모금된 300원을 기초로 교회당건축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다.
1940년 교인들은 예배당 없이 약 1년간이나 홍이관 집사 댁에서 4~5인이 모여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던 중 9월 4일부터 강태즙 목사의 인도로 집회를 열고 신자들 모두 흡족한 은혜를 받았다.
겸이포교회 성도들의 기도에 주님의 응답이 나타났다. 각 지역의 믿는 형제들의 도움도 받게 되어, 수개월 전에 겸이포에서 제일 지대가 좋은 중앙 구릉상에 천주교에서 임시로 건축을 하고 예배하던 건물을 4~5인이 신앙으로 계약하고 아무 어려움 없이 매수하여 1941년 5월 11일 주일부터 새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새로 믿는 신자도 날로 늘어나 교회는 재생의 봄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주일마다 30인씩 모여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린다. 이명직 목사는 이사장 순회일정으로 1941년 5월 26일 겸이포교회를 방문하였다.
겸이포성결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겸이포교회는 교회를 재건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1946년 3월 현재 ‘겸이포교회는 신도 2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전했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