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성결교회(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동부동 350-1)는 1932년 10월, 평북 의주읍으로 파송을 받은 문학열 형제의 헌신적 사역으로 설립되었다. 개척한 지 한 달여 만에 장년 신자만 평균 40여 명이 모이고 미신자까지 합하면 평균 60~70여 명이 모였다.
특별히 의주의 악질 불량자들이 주께 돌아왔으므로 주의 크신 권능을 칭송하게 되었으며, 또한 주께서 차기주 자매의 마음을 열어, 그의 전 재산으로 150인 가량 수용할 수 있는 집을 사서 교회에 바치게 하심으로 더욱 영광을 주께 돌렸다.
1934년 음력 정월 14일∼18일까지 신의주교회 한성과 전도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열었는데 평균 200여 명씩 모이며, 3~4명은 철야기도 하며 중생자가 40여 명, 성결자 10여 명 특별헌금이 20여 원에 달하였다.
3월 21일∼25일까지 봉천교회 황성택 전도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열었는데 저녁집회에서 300여 명씩 모이며, 철야기도자 10여 명, 중생자 17인, 성결자 13인이나 되어 일반은 큰 영광을 주께 돌렸다.
10월 22일부터 일주일간 부흥회를 하였는데 중생자 10명, 성결자 15명, 특별헌금이 50여 원이나 되었으며 리몽은 씨는 부흥회 비용을 전담하였고, 리신행 씨는 자신의 전 재산을 별세하는 때에 교회에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1936년 부흥회를 준비하기 위해 ‘대산’이란 산에 가서 5일간 기도하는 중에 신명기 7장 20절 말씀의 계시를 받고 김영균 전도사를 청하여, 10월 12일부터 1주일 동안 집회하는 중에 교회창립 이래 처음 되는 부흥의 역사가 임하였으므로 주께 영광을 돌렸다.
대 집회에 1,000명까지 회집하였고, 강사의 귓병이 고침을 받고, 난치의 병에서 나음 받은 자가 생겨났고 성령의 불은 맹렬하게 임하여 장로교, 감리교인도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또한 교회당 건축을 위해 헌금한 것이 1,000원에 달하였다. 1937년, 의주천막전도대회가 6월 17일 밤∼25일까지 1주간 매일 4회의 집회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회의 교우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운집하는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8월 11일부터 한주간 리건 목사의 인도로 매일 3차씩 집회하는 중 풍성한 은혜가 나타나 넘치는 은혜를 받았다. 새벽기도회에는 80여 명, 낮 공부에는 100여 명, 밤 부흥회에는 300여 명씩 모였는데 금번 집회에서 세 가정이 ‘전가귀도’ 되었고 감사헌금은 320여 원에 달하였다.
1939년 4월 27일부터 8일 동안 ‘의주 천막전도집회’가 세 번째로 열렸는데 예배당이 협착하여 조금이라도 늦으면 밖에서 추위에 떨면서 끝까지 주의 말씀 사모하는 것을 보고 예배당 증축을 위해 헌금하여 900여 원이 그 자리에서 나서 주님의 이적을 찬송하였다. ‘이철’이란 처녀는 극진히 아끼던 보석, 금반지를 바쳐 일반에 큰 감동을 주었고 장로교의 형제·자매들도 열심 헌금하였다.
9월 10일∼18일까지 9일간 ‘한성과’ 목사를 초청하여 추기 수양회를 열었는데 영적 기갈에 애타던 많은 심령들은 첫 집회부터 운집하여 장소 협착으로 문밖까지 서서 듣는 자 무수하였다.
의주성결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교회를 재건한 의주교회는, 1946년 3월에 이용선 목사를 중심으로 집회를 통해 큰 부흥이 일어나 150여 명까지 모였으며, 약 10만 원의 헌금을 드려 ‘독립기념예배당 건축’을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3월 1일 폭동으로 교회의 내부가 파괴되고 시국의 변동으로 ‘리용선’ 목사는 ‘소련특무사령부’에 걸려 부득이 월남하고 리봉녀 전도부인이 수고하는 중으로 전해진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