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1944년 4월 5일) 자료에는 1943년 12월 29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쇄된 성결교회 명부가 기록되어 있는데 ‘연안성결교회’가 두 개 소(황해도 연안군 연안면 모정리 63 /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관천리)로 기록되어 있다.
한 곳은 황해도 연안군(延安郡)에 소재한 연안성결교회이고, 또 한 곳은 연백군(延白郡)에 소재한 교회이다. 이 기록이 맞다면 이해를 위해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1914년에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연안군(延安郡)과 배천군(白川郡)을 합하여 연백군이 된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 기록은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에는 이보다는 행정구역은 연백군이지만 과거에 부르던 습관에 따른 기록이라고 보인다.
그동안 북한교회 연구가들이 발견하지 못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실제로 ‘연안성결교회가 두 번 개척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어보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개척된 연안성결교회(황해도 연안군 연안면 모정리 63)는 1932년 가을에 이봉권(李鳳權) 전도사를 파송하여 설립하였다. 이 전도사는 이곳에 도착하여 얼마 동안 악전고투한 결과 몇 사람의 구도자를 얻게 되었다.
또한 주의 허락으로 예배당 부지 400여 평을 사고 신자들은 기쁨으로 예배당이 신 건축되기까지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작정하였으며 주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구도자의 수가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활천』(1933년 4월호)에는 장·유년 100여 명이 넘는 사진이 ‘연안교회 신자 일동’이라는 제목으로 설명과 함께 실려있다. 1934년 1월에는 이봉권 전도사의 후임으로 김상운 전도사가 부임한다. 11월 21일부터 5일간 안형수 목사의 인도로 부흥회가 있었는데 모든 신자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해도 연안군(연백군) 연안면 모정리 63’에 설립된 교회는 부진한 상태가 되어 폐지되고 만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후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병겸 집사의 활동으로 두 번째 ‘연안교회’(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관천리 소재)가 1940년 3월에 설립되었다.
본래 한병겸 집사는 모 교회가 경성 죽첨정교회(현 아현교회)의 집사였는데 1938년에 연안군청 토목과로 전근을 와서 집을 개방하여 예배드리다가 1940년 3월 첫 주일에 창립예배를 드렸는데 해주교회 지교회로 속하게 되었다. 점차 구도자가 증가하여 주택 전체를 수리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7월 1일부터 1주간 해주교회 김기삼 목사의 인도로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장마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만원을 이루었고 신 결심자 30여 명과 헌금 400여 원이 났으며, 주일 학생도 매 주일 100여 명씩 모이게 되었고 새로 세례를 받은 자 2인, 학습 받은 자 14인이나 되었다.
1941년 5월 20일에 ‘황해구역순회’차 연안교회를 방문한 이명직 목사는 ‘연안교회는 매 주일 5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현재 세례교인도 10여 명이나 된다.
또한 예배할 처소가 없어 한병겸 집사가 자기의 집을 개방하여 예배하다가 자신의 모 교회인 죽첨정교회의 도움을 받고, 각 방면으로 활동하여 건물 1동을 매수하여 이제 당당히 예배를 드리는 중이다’고 전하였다.
연안성결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연안교회는 교회를 재건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1946년 3월 현재 ‘연안교회는 윤철한 목사와 신도 100여 명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음을 전한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