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성’은 한반도 최북단에 있는 지역으로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약 650km 정도이다. ‘이어도’보다 멀고, 중국의 선양(심양), 칭다오, 일본의 히로시마보다도 멀다.
동·서·북쪽은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여 중국 길림성(吉林省) · 혼춘(琿春) · 도문(圖們) 지방과 마주 대하고 있으며, 남쪽은 종성군과 경원군에 접하고 있다. 함경산맥의 여맥이 이곳까지 뻗어 남고북저의 지형을 이루며, 중앙은 낮고 평평한 분지가 발달하였다.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은 남양면 풍리동 부근에서 곡류하여, 풍서동에서 비교적 넓은 하안평야를 이루고, 온성과 훈융 지역에는 넓은 범람원을 발달시켰다.
이 밖에 남산천(南山川) · 월파천(月坡川) · 풍천천(豐川川) 등이 북류하여 두만강에 유입한다. 토양은 하천 퇴적물의 비옥한 사양토이다. 북쪽에 위치하여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겨울에는 삼한사온이 현저하다.
온성성결교회(함경북도 온성군 온성면 동화동)가 설립될 당시 온성군에는 석왕사(釋王寺)를 비롯한 4곳의 사찰과 온성장로교회(동화동)와 훈계장로교회(훈계동) 등 4개소의 캐나다계의 장로교회가 있었다.
특히 ‘동화동’은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이었던 온성향교(1445년)와 충곡서원(1606년)이 있었고, 당시 면 소재지와 군청 소재지였다.
국경 지역이었기에 1920년대에는 독립군의 항일운동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1935년 남양과 훈융 두 곳에 대륙을 연결하는 국제철도의 개통으로 그 분기점이 되었고, 온성군 내 두 곳에 갈 탄광이 개발되었다.
온성교회는 1932년 9월 27일에 전기찬 전도사를 파송하여 설립하였다. 1934년 이원근 목사의 순회기를 이용하여 4월 10일∼14일까지 부흥회 겸 전도회를 열었는데 집회마다 70~80명씩 모여 큰 은혜를 받는 중 신 결심자가 20명이며 학습을 받은 자가 12명이었다.
또한 7월 7일∼11일까지 전서국 전도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열었는데 일반신자는 풍성한 은혜를 받고 새로 결심한 자가 38명이고 경종을 위해 40여 원을 헌금하였다.
1936년에는 예배당 건축을 위해 40일간 기도회를 갖고, 10월 20일부터 1주간을 특별기도회를 한 후 예배당을 위해 헌금하니 100원이나 되었다.
실로 신자들의 생활에 비하면 큰 헌금인데, 이후 남양동(南陽洞)과 용전(龍田)에 사는 교우들이 40원을 헌금하였고, 또 본부로부터 130원의 보조를 받아 합 270원으로 대지 150평과 와가(瓦家) 10간을 매수하고 수리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므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렸다.
1936년 11월 1일 유봉운 전도사가 전기찬 전도사 후임으로 부임하였으며, 1937년 1월 8일∼11일까지 강송 목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열고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중생자 20명, 성결의 은혜를 받은 자 20명이었다.
3월 13일∼17일까지 5일간 박문익 전도사의 인도로 장·유년부흥회를 연 결과 일반신자는 큰 은혜를 받았고 새 결심자가 20명이나 되었으며, 특별히 유년들이 회개에 철저한 열매 맺는 은혜를 받은 결과 그 가정과 학교의 관공서에까지 복음의 빛이 드러나게 되었다.
1938년 10월, 고원교회의 이류경 전도사가 온성교회로 부임하고 온성교회의 유봉운 전도사는 서수라교회로 이동하였다.
10월 4일∼7일까지 한성과 목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열고 일반 교우는 큰 은혜를 받는 중 새 결심자를 많이 얻었으며 또한 예배당 건축을 위해 260여 원의 헌금까지 있게 되어 더욱 감사하는 중, 교회는 날로 부흥 있고 또 유망한 새신자도 많이 출석하게 되었다.
온성성결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