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정복음전도관’ 설립(1907년) 2주년 기념교회의 의미로 조선에 세 번째 세워진 교회가 ‘개성(송도)복음전도관’이다.
경기도 북서부 마식령산맥의 말단부에 있는 개성은 경기도의 3대 읍 가운데서 제일 큰 상업 도시로 동양선교회는 1909년 5월 전략적으로 강태온과 김두엽 두 전도사를 파송하여 ‘개성복음전도관’을 설립하였다.
개성(송도)은 미국 남감리교회 콜리어(CT.Collyer, 高永福) 선교사에 의해 1896년 11월부터 전도가 시작되었다.
그 열매로 1898년 9월 ‘남부교회’, 1901년 9월에는 ‘북부교회’가 설립되었다. 구세군도 이곳에서 사역하고 있었으며 개성복음전도관은 이들 교회와 협력하며 사역하였다.
1910년에는 길보른과 토마스가 이곳에 방문하여 지역교회들의 연합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 동안 개성을 중심으로 사방 30리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13년 동안 강태온·김상준 등 5명의 주임 교역자와 이명직·이명헌을 비롯한 8명의 부교역자, 7명의 여교역자가 사역하며 ‘급진적 성결운동(사중복음)’을 통해 많은 성결인들을 일으켰다. 특히 여교역자 중 리유겸·허순성은 개성교회의 열매였다.
하지만 개성교회는 1922년 6월에 30여 명의 신자를 ‘미 남감리교회’에 양여함과 동시에 교회를 폐지하였다.
이후 동양선교회는 1932년 7월 7일 새롭게 개성교회 개척을 위해 성서학원 졸업생인 이창선 전도사를 파송하였는데 그는 열심히 활동하던 중 ‘동본정 192번지’에 예배장소를 정하고 10여 명의 신자를 얻어 예배를 드렸다.
1933년 2월 2일∼5일까지 ‘신은천 형제’의 인도 하에 부흥회를 열고 결심자 17인, 중생자 7인, 성결자 5인을 새로 얻는 동시에 구도자 중 첩(妾)을 버린 일, 사귀병에서 고침 받은 일, 30여 년 고질을 고친 일, 우상거절과 전가귀도한 집이 다섯 가정이나 되었다.
개성교회는 1933년 ‘동본정 192’에서 ‘지정 106번지’로 예배당을 이전하였다. 12월 2일∼10일까지 최석모 목사와 신은천 전도사를 청해 부흥회를 열었는데 새로 믿기로 결심한 자가 21인, 중생과 성결의 은혜를 받은 이도 17인이나 되고 예배당 건축을 목적으로 헌금한 총액 235환으로 예배당 대지를 매수하여 1934년 6월 4일 ‘동본정 86-3’으로 이전하였다.
1934년 9월 ‘전선 순회 장막전도대’의 집회와 1937년 5월 ‘천막전도대’의 집회 등은 교회 부흥에 큰 힘이 되었다.
또한 12월 25일부터 5일간 ‘백재흥 전도부인’의 인도로 ‘소아를 위한 부흥회’를 한 결과 죄를 통회하는 은혜에 감사하여 가락지를 교회에 바친 자가 세 사람이며 새로 결심한 자가 15명이나 되었다. 1936년 10월 새로 부임한 박형규 목사는 1940년에 교회를 신축하였다.
개성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개성지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해방 이후 1947년 12월에 개성교회의 신자 이재근 씨는 ‘신학교유지재단 기성회’에 거액의 토지를 기부하였다.
“개성교회 이재근 씨는 당시 시가 50만원 가량 되는 토성에 소재한 토지 1만5,000평을 작년 12월에 본 신학교 유지재단 기성회에 바쳤습니다. 이재근 씨는 개성 사직동에서 평안철물공장을 운영하는바 부모님 때부터 개성성결교회를 많이 도왔으며 그의 맏형 이재홍 씨는 신학교 재건 당시에 일금 오천 원을 신학교엘 친히 와서 바쳤습니다. 금번에 거액을 바친 것도 셋째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표라 합니다.”
이처럼 개성교회는 해방 이후 교단과 신학교 재건을 위해 큰 역할을 감당했음을 볼 수 있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