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신의주는 중국의 대안 · 안동 등과 연결되는 인구 2만6,000여 명의 국경 대도시였다. 또한 철도를 통한 러시아와의 빈번한 연락으로 러시아의 무신론과 공산 사상이 몰려들어 왔다.
교회는 장로교 3처와 안식교 1개소와 천주교 1개소가 있었다. 신의주성결교회(평안북도 신의주부 미륵동 196-2)는 1927년 ‘년회’에서 교회를 신설하기로 결의하고, 4월에 평양교회에서 사역하던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 김제근 전도사를 개척자로 신의주에 파송하여 ‘진사정 7정목 21번지’ 집을 새로 얻어 예배드림으로 설립되었다.
1930년 5월 14일〜18일까지 5일간 동양선교회 천막전도회가 신의주교회에서 열렸다. 이 집회는 타교파의 신자, 직원들도 많이 참석하여 매일 밤 400~500명으로 1,000여 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모여 성결의 은혜받기를 사모하였다.
그해 여름 임대하여 사용하던 건물 주인이 바뀌면서 교회는 갑자기 예배당을 잃고 방황하다가 ‘운정정 9번지’에 신축 중인 가옥을 세로 얻어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외진 위치와 주위에 관청과 회사에서 근무하는 일본인과 동포의 사택들이 많아 예배 때마다 저들의 비난이 심해 많은 방해와 괴로움을 1년여 동안이나 당하였다.
1931년 7월, 성서학원을 졸업한 한성과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그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미국에 있는 어떤 성도를 통해 4천여원이란 거액을 보내주심으로 ‘예배당을 허락해 달라는 눈물의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신의주는 국경도시임으로 오다가다 가난에 몰린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라 신자들도 그날그날 생활에 시달리는 형편이었지만 마음을 다해 헌금하여 총경비 4,366원으로 ‘미륵동 196-2’에 대지 204평을 매수하고 8월 25일부터 건축공사에 착수하여 11월 15일 낮 12시에 봉헌예배(예배당 45평, 주택 14평)를 드렸다.
1936년 신의주동부교회가 개척됨에 따라 교회 명칭을 ‘신의주서부교회’로 변경하였고 최헌 목사, 1938년에는 황성택 목사가 부임하여 사역하였다.
이 무렵 교인은 170여 명이었다. 신의주서부교회는 ‘초대교회 오순절부흥회’를 목표하고 성서학원 교수 박현명 목사를 청하여 9월 12일〜18일까지 신앙부흥대회를 개최하고 매일 3회씩 집회와 좌담회, 사경회를 열고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
1939년 11월 20일부터 1주간 리건 목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열고 매일 3차례씩 모이던 중 성신의 놀라운 역사로 일반 회중은 풍성한 은혜를 받았으며, 그해 여름 지교회로 개척한 ‘민포동교회’ 신건축경비를 위해 2천원의 헌금을 하였다.
또한 12월 10일(주일)에는 남녀 23명의 입회식과 성찬식이 있어 주께 영광을 돌렸다. 1941년에는 한성과 목사가 또다시 부임하여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신의주서부교회는 1945년 해방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1946년 3월말, 장리초 목사와 60여 명의 신도들이 모이고 있음”을 전하였다.
한편 1947년 10월, 이용선 목사는 “신의주서부교회는 해방 후 예배당 문제로 크게 곤란을 당하여 오래 동안 주택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다시 교회 건물을 찾고 새롭게 부흥하여 150여 명이 모였지만 장리초 목사의 전근으로 모이는 수가 100명 내외로 줄어들었지만 신의주동부교회 최헌 목사가 겸임하고 백동수 전도부인 중심으로 예배드리고 있다”고 전하였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