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포복음전도관은 동양선교회가 조선에 ‘급진적 성결운동’(순복음, 사중복음)을 위해 1907년 5월 30일 ‘무교정복음전도관’을 세운 후 1908년 5월 강태온·김혁준 두 전도사를 파송해 평안남도 유일의 개항장이었던 진남포에 두 번째로 세운 복음전도관이다.
19세기말 진남포항은 평안남도 삼화면에 속했던 조그마한 어장이었지만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이 드나들게 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이곳은 일본의 군사기지로 군수품 수송의 핵심 항구가 되었고 1910년 ‘진남포부’가 됨에 따라 이곳 인구는 비약적으로 증가되었으며 이후 진남포항은 일본의 동경, 오오사까, 나가사끼와 중국의 대련, 청도, 상해를 연결하는 주요 항로였고 신의주·인천·군산·목포·부산 등을 잇는 연안항로의 기착지로 조선 북부의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진남포교회가 설립될 당시 인구는 1만1,300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 사람이 8,100여 명, 일본 사람이 2,900여 명, 그 밖의 다른 나라 사람이 4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항구 도시인 진남포는 조선과 일본의 장사치들이 뒤섞여 서로 속이고 속는 일이 많은 까닭에 인심이 사나운 곳이어서 복음전도가 어려운 곳이었다.
진남포성결교회가 설립될 당시 진남포에는 1896년 ‘북장로회선교부’가 설립한 ‘노정교회’와 이후 설립된 ‘비석리교회’를 비롯해 6개의 장로교회와 1894년에 전도를 시작해 신흥리·억양기리·비석리 등에 세워진 3개의 감리교회를 통해 예수교가 전해졌다.
이처럼 장·감 두 교파의 교회들이 교세를 크게 확장하고 있는 때인 1908년 5월에 ‘진남포복음전도관’이 설립되었으나 1년 뒤에 폐지되었다.
동양선교회는 1911년에 다시 김혁준과 김두엽 전도사와 최홍은 전도부인을 파송하여 교회를 재건하였지만 난관을 이기지 못하고 1년만인 1911년에 또 다시 폐지되고 말았다.
“이는 먼저 교역자들이 개척하는 일에 경험이 없음이요. 또는 이곳에 파송 받은 교역자들의 본 가(家)가 가까이 있는 관계로 자기 집에 가서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많이 허비하고 전도에 전력하지 아니함이요 또는 서울과 같이 번화한 곳에서 살며 전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힘써 일하지 아니함으로 필경 폐지된 것이다.”
하지만 동양선교회는 ‘지리상으로든지 교회의 배치로든지 중대한 관계가 있는 진남포’에 다시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1929년 4월에 박정훈 전도사를 파송하여 제3차로 교회를 설립하였다.
“진남포교회의 신개척 사업은 4월 7일 주일부터 비석리 142번지에서 구도자 8명 외 20여 명이 재미있게 예배하는 중 동일 밤에는 구도자 7명을 더 얻어서 30여 명이 예배를 보았으며 8일부터 11일까지는 이건 목사를 청하여 ‘대거전도회’를 밤마다 열고 30~40명의 군중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중 결심자 13명을 얻었음으로 승리 중 주께 영광을 돌렸다.”
또한 1929년 6월 15〜21일까지는 이건과 김용자 씨의 인도 하에 천막을 치고 매일 밤 대거전도회를 개최하였는데 믿기로 작정한 자가 32명에 달하였다.”
이 같은 전도활동 결과 1932년 12월의 진남포교회의 교세는 장년이 80~90명이요, 유년이 100여 명으로 부흥하였다. 1939년 2월에는 4,000여 원 되는 예배당을 매수하였다.
이후 ‘진남포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진남포지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해방과 함께 교회재건을 위해 온 신도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 교회의 재건을 위해 헌신한 “이성봉 목사가 1946년 3월에 전한 소식에 따르면 진남포교회는 해방과 함께 다시 교회를 재건하여 박용현 목사와 90여 명의 신도들이 열심 있는 믿음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