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성결교회(평안남도 평양부 인흥정 129)는 1932년 경성성서학원에 재학 중인 이용선 형제를 파송하여 설립되었다. 파송을 받은 이용선 형제는 수십 일간 예배당으로 사용할 장소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3칸의 집을 세로 얻어 7월 24일 창립예배를 드렸다. 기림리교회가 설립될 당시 평양시내에는 30여 개소의 교회가 있었는데 그중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도 5개소가 있었다.
1933년 예배당이 없어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중 신자들과 교역자는 주께 열심히 기도하였다. 7월 11일에는 건축을 위한 헌금을 하였는데 500여 원이 헌금되었다. 이용선 형제는 본부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도움을 받지 못함으로 개인과 선교사를 찾아다니며 후원을 요청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예배당 부지 81평, 건물 36평의 일와일제 ㄱ자로 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또한 경성성서학원 여자부교수인 ‘테잇트’ 선생이 80원짜리 좋은 종을 기부하였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다소의 부채가 있었으나 12월 3일에 헌당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헌당식은 평양부내의 각 교회 교역자 및 신도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변남성 목사의 주례로 진행되었다.
1935년 기림리교회는 성신의 역사로 날로 부흥되는 가운데 80여 원의 풍금을 구입하였고 김기순이라는 자매는 사귀병에서 신유의 권능으로 나음 받고 감사함으로 시계 한 개를 교회에 드렸다. 또한 박문익 전도사의 인도로 소아부흥회를 한 결과 100명∼250여 명까지 모여 은혜를 받았다.
1937년 5월 24일부터 8일간 이성봉 목사의 인도로 천막전도회를 한 결과 평양부내의 여러 교회 신자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치게 되었는데 새벽은 70명∼200명, 오전 공부에는 90명∼5백명, 밤에는 500명∼2,200명까지 회집하였으며, 새 결심자는 157명이나 되었으며 건축을 위해 812원이 헌금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간증회와 신유회가 있었다. 이용선 전도사는 1937년 12월에 열린 제1회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8년 6월 이후 이용선 목사는 암정교회를 겸임하여 목회하였다. 10월 17일부터 23일까지 한성과 목사의 인도로 부흥사경회를 열고 일반은 풍성한 은혜 받는 중 인근 각 교회 신자들까지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1939년 3월 17일부터 6일간 박현명 목사의 인도로 매일 3차씩 집회를 하는 중 풍성한 은혜가 일반에게 임하였다. 1940년 3월 4일부터 10일까지 오덕삼 목사를 청하여 일주일간 부흥회를 하였는데 일반은 큰 은혜를 받았으며 예배당 건축을 위해 헌금하니 3,200원이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기림리교회는 1941년 7월 12일에 서평양성결교회로 교회 명칭을 변경한다. 12월 3일에는 예배당을 ‘기림리 180번지’에서 ‘인흥리 129번지’로 옮기고 교회 명칭을 대동성결교회로 변경하였다.
대동성결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였고 1946년에는 김홍순 목사와 신도 80여 명이 매 주일 모여 예배를 드렸다.
1947년에는 김봉업 장로를 중심으로 매주 십일조 헌금을 시행하여 남녀교역자 세 가정에 매삭 2만여 원의 경비를 쓰고도 여유가 있어 예배당을 수리하고 은혜를 풍성히 받는 중인데, 정진경 전도사는 월남하여 수양 중이고 전도부인이 수고를 하며, 김홍순 목사는 부흥회를 여러 곳 인도하는 중 반동분자라는 죄명 하에 1947년 4월부터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진남포 감옥에서 복역 했음이 전해진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