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면은 1914년 북청군 중평면에서 ‘평’자와 중산면에서 ‘산’자를 따서 병합하여 신설된 면(面)으로 7개리를 관할하였다. 1939년에는 면(面) 전체가 북청군 속후면과 신북청면에 분리 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
평산교회(북청군 평산면 용전리 622)는 북청교회의 지교회로 1922년 9월에 리정원 전도사를 파송하여 설립한 교회인데 열심히 전도한 결과 장년만 30여 명의 신자를 얻어 설립하였다.
하지만 예배당이 없어서 큰 곤란을 겪던 중 ‘김병갑’ 모친이 예배당 건축 할 대지로 100평을 바치고, 또 한 형제는 목재(木材)를 연보하여 4간 예배당을 건축하고 12월 24일에 성탄축하회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1925년 말 평산교회의 교세는 장년신자 27명(세례 5인, 학습 10인) 주일학생 45명이었다. 1926년 4월 주순진 전도사는 어포리교회로, 어포리교회의 김영범 목사는 평산교회로 부임한다.
1927년 당시 성서학원에서 수양을 받고 있던 평산교회 출신 주영식 형제는 자기의 세간을 방매하여 학자금으로 사용하고 남은 돈 25원을 교회에 바쳤는데 교회에서는 이 돈으로 오랫동안 현안이던 ‘경종’을 구입했다.
1928년 12월 7〜12일까지 북청읍교회 리문현 전도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하고 매일 청신기도회, 오전 사경회와 저녁 성별회 등으로 집회를 열어 일반신자와 교역자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
특히 감사한 일은 오랫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여오던 박윤성 형제가 완전히 통회 자복하고 주에게로 돌아온 일이며 마지막 날 아침예배 시간에는 성탄기념헌금과 신년월정헌금까지 기쁨으로 작정하였다.
1928년 8월 8〜12일 5일간 특별집회를 열고 교역자와 신자들이 원근 4, 5개소를 순회하며 1,200여 명의 대중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는 중 결심자 70여 명을 얻었다.
9월 함경도지역의 수해로 인해 수다한 인명이 사상(死償)되었을 뿐 아니라 평산교회도 도괴(倒壞, 넘어지고 무너짐)되어 주택과 예배당을 개축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 가정들도 수해를 당했기에 교회를 건축할 여력이 없고 오직 서로 바라보며 기한(飢寒, 굶주림과 추위)에 우는 상황이었다.
이에 동양선교회는「활천」을 통해 전국교회들의 기도와 물질로 힘 있는 대로 동정하여 주기를 알렸는데 많은 교회들이 모금에 참여하여 총 230여 원이 모금되었다.
평산교회는 예배당 건축공사를 9월에 시작하여 12월 3일에 김응조 목사의 인도 하에 ‘헌당식’을 거행하는 중 괘종을 변윤성·동정홍 양씨가 기부하였고 56인의 결심자를 얻었다.
주영식 전도사는 제 9회 함흥지방회(1931년 11월 1일〜20일)에서 “주영식 전도사 병세 나음(행보케 되었음),
‘신자 배가운동’으로 배가 이상의 성적을 얻었음, 신자 기도의 열심으로 전도 열기와 헌금 열기 있음, 신유의 역사 나타남, 성미 열 많음, 우상 박멸당한 자가 예수교 신자 망하게 하여 달라고 자기 우상에게 축원한 일, 장년신자 50명, 주일학생 90여 명”임을 보고하였다.
11월 21일에 ‘창립 10주년 기념예배’를 드린 후 3일간 강송수 목사와 박현이 전도사의 인도 하에 전도회를 개최하였는데 구도자가 45인이나 되었다.
1934년 2월 26일〜3월 2일까지 김형식 전도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열었는데 일반은 큰 은혜를 받았고 중생과 성결의 은혜 받은 자가 19명이나 되었다.
또한 3월 29일〜31일까지 3일간 리준수 목사의 인도로 소아부흥회를 열었는데 모든 아동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
1935년 1월 7일에는 신북청교회에서 ‘리건’ 목사의 주례로 ‘신북청교회와 평산교회 연합 성찬식’이 있었다. 평산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